애덤스미스 일생과 도덕감정론, 국부론의 탄생

Cait's Story/경제사 공부|2019. 11. 21. 04:34
c
c
c
c

"인간 개개인의 이기심이 사회 전체의 부를 형성하는 원동력이 된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1723년 스코틀랜드의 항구마을 커콜디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름 역시 애덤 스미스였으며, 그가 태어나기 몇 개월 전인 1723년에 사망하여, 애덤 스미스는 홀어머니 밑에서 외아들로 성장하였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1732년 커콜디의 시립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독서에 대한 열정과 비범한 기억력으로 주변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5년 후인 1737년 11월에는 14살의 나이로 글래스고대학에 진학하였습니다.


애덤스미스


애덤스미스는 1740년 잉글랜드에 위치한 옥스퍼드대학의 장학생으로 선발디어 옥스퍼드 대학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옥스퍼드대학에서 약 6년간 음울한 학창 시절을 보냈는데요.

병치레가 잦았던 그는 고향에 있는 어머니에게 괴혈병 및 두통 등을 호소하며 치료약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적지 않게 보냈다고 합니다.

특히나 그가 재학중이던 옥스퍼드는 이미 지적인 분위기를 잃어가고 있었는데요.

그는 훗날 자신의 저서인 <국부론>에서 옥스퍼드 대학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판을 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대부분의 교수들은 벌써 몇 년동안 강단에 서려고 하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당시 그는 사촌형에게 쓴 편지에서도 "우리들이 이곳에서 하는 일이란 고작 하루에 두 번 예배에 참석하고 일주일에 두 번 강의를 듣는 것이 전부입니다." 라고 적었습니다.

당시의 옥스퍼드 대학은 상당히 보수적이었으며, 교수들은 교육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고 이에 따라 학생들 또한 공부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옥스퍼드에서 얻은 것이 있었으니,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 환멸을 느끼고 혼자 도서관에서 영국, 그리스, 프랑스, 이탈리아의 시인과 문인들의 고전을 탐독한 것이었습니다.

또 그는 프랑스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연습도 하고, 라틴어와 그리스어 습득에도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훗날 애덤스미스는 자신으로 하여금 독서에 몰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던 옥스퍼드 대학에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옥스퍼드대학은 스코틀랜드 출신 장학생들에 대해 차별 대우가 많아 애덤 스미스를 비롯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장학생들은 차별철폐 및 지위개선을 요구하였으나 처우는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애덤 스미스는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1746년 옥스퍼드 대학을 떠나 고향인 커콜디로 돌아가게 됩니다.


도덕감정론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와 함께 세월을 보내고 있던 애덤 스미스는 에든버러에서 개최되는 수사학과 문학에 관한 강의에 강사로서 초청을 받게 됩니다.

이 공개강좌에서 그의 강의가 호평을 받으며 그는 1751년 글래스고 대학 논리학 강좌의 교수로 위촉되게 되었습니다.

다음해에 그는 도덕철학 강좌를 맡게 되었으며 이후 13년동안 강의를 계속 했습니다.

그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글래스고는 그가 학창시절(대학생활)을 보낸 곳으로 연해도시입니다.

당시 이곳은 한창 발전해 가는 과정에 있었으며, 특히 담배의 집산지 및 유럽과의 중계항구로서 성장을 계속하고 있던 글래스고항을 끼고 있었습니다.


담배 무역의 발전과 함께 글래스고와 그 주변에서는 직물업, 설탕 정제업 닻 로프 등의 제조업, 유리공업, 제철업, 탄광업 등 여러 제조업이 다양하게 발달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산업구조의 다양화와 자본주의에 변혁의 물결이 일고 있을 때 글래스고에서 애덤 스미스는 1759년 그의 최초 저서 <도덕감정론>을 출간했습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하여 인간의 덕성은 어디에 있으며, 또한 도덕적인 판단은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해 규명하고자 하였는데요.

당시에는 중세의 종교적 교리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세의 생활은 사후의 영혼을 구제하는데 도움이 되면 그만이라는 사고 방식이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또 인간의 이기심을 부정하고, 자애심을 육성하며, 이성에 의해 감정을 극복하고, 인경향상을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는 주의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자애심이란 사회를 감사와 애정이 넘치는 상태로 유지시켜주기 때문에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한 요소가 없어도 사회는 존속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인간은 원래 자기중심적인 동물이며, 이러한 이기심을 추구하기 위한 행동은 본인의 이익 뿐 아니라 사회의 이익도 가져온다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는 도덕적 판단 기준은 '동감 (sympathy)'이라는 인간의 감정 능력을 얻을 수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즉 제 3자가 봤을 때도 그것이 도덕적으로 적절하다면 동감을 얻는다고 본 것입니다.

또한 애덤스미스는 도덕적 잣대 (동감) 뿐 아니라 이러한 이기적인 개개인의 행위를 규제하는 또 하나는 '정의의 법'이라 하였습니다.


'자기억제(즉 동감을 얻은 행동, 법에 어긋나지 않는 행동)를 동반한 이기심'을 가진 개인의 행위를 규제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자유롭게 내버려 두면 된다.

그리고 이것이 '보이지 않는 손 (invisible hand)'을 통해 상호작용 하게 되면 결국 사회 전체의 이익과 직결된다.


는 것이 애덤 스미스의 주장 입니다.

즉 정부나 시장의 개입이 없더라도, 개개인의 이기심에 의한 경제활동은 개인의 이득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회 전체의 이득을 가져온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도덕감정론>의 간행으로 애덤 스미스는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어 잉글랜드 뿐 아니라 프랑스, 독일 등에서도 그의 이름이 너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책은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습니다.


타운센드경은 그의 평판을 익히 알고 있어, 그의 양자 아들인 버클로 공작의 가정 교사 자격으로 그를 프랑스 여행에 동참하게 합니다.

1763년 11월 애덤 스미스는 대학에 사의를 표명하고, 다음해 2월 파리로 향하여 1년 반여 동안 파리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당시 프랑스의 사교계에서도 이미 그의 명성이 자자하여 상류층 모임에서 대환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잘 생긴 외모는 아니었지만 남을 매료시키는 따뜻한 마음과 지성을 겸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애덤스미스는 지난 번에 언급했던 프랑스의 경제학자 케네와 중농주의자들을 이 파리 여행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는 한 모임에서 로베르 튀르고를 소개받게 되고, 그와 자주 만나 산업과 은행 및 신용 이론 등 훗날 <국부론>에서 거론하게 되는 제반 문제점에 대한 심도 깊은 토론을 하였습니다.


1766년 10월 그는 잉글랜드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는 런던에서 잠시 체류한 뒤 1767년 10월 무렵 다시 스코틀랜드의 커콜디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이당시 이미 <국부론>을 집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초 1772년 초겨울까지는 원고가 완성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중간에 경제공황으로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을 돕기도 하고, 또 건강이 좋지 않아 집필을 중단하기도 했습니다.

1773년 봄, 이미 50대가 된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의 거의 완성된 원고를 들고 런던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이 이후 애덤 스미스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의 동향과 동인도회사와 관련된 복잡한 문제들의 자료수집으로 바빠, 국부론이 출간되기 까지 3년의 세월이 소요되었습니다.


국부론


마침내 1776년 3월 9일 무려 1,000쪽을 넘는 <국부론>이 발간되었습니다.

초판본의 원제는 <모든 국민의 부의 성질과 제반원인에 관한 연구> 였습니다.

<국부론>은 애덤스미스의 광범위한 지식, 경제사정과 경제활동에 대한 예리한 통찰, 여러 계층 사람들과의 대화, 지성인들과의 토론, 그리고 본인이 저술한 <도덕감정론> 등을 기초로 하여 완성되었습니다.


애덤스미스가 국부론을 집필한 목적은 두가지였는데요.

하나는 '어떻게 하면 국민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하나는 '시민사회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국가의 재원은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를 연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국민과 국가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는 이기심의 해방과 자유방임정책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1700년대 후반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자본주의 사회가 확립되면서 리카도와 맬서스가 등장하여 경제학의 과학성을 더욱 발전시켰는데, 그들은 <국부론>을 성전처럼 취급했다고 합니다.


1790년 7월 17일, 그는 "여러분, 나는 여러분들과 계속 함께 있고 싶지만, 이제 그만 저세상으로 가야할 것 같습니다." 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Cait's Story > 경제사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농주의 Physiocracy  (0) 2019.11.06
중상주의 정책  (0) 2019.11.02

댓글()